“한여름 밤엔 에어컨 틀고 샤워하며 노숙했지만…”
“한여름 밤엔 에어컨 틀고 샤워하며 노숙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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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외환위기 때 다니던 봉제공장이 도산하자, 당시 35세의 김봉덕(가명) 씨는 보금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서울 영등포역에서 잠을 잔 그날 밤, 새벽에 노숙인 시설에서 나온 담당자가 김씨를 발견했고 전단지 한 장을 주었습니다. 10년이 넘게 보호시설 입소와 퇴소를 되풀이하는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3개월쯤 시설에서 생활했죠. 300명 정도가 모여 있었는데 그 때는 아침만 먹고 밖으로 나갔다가 저녁에야 들어오라고 했어요. 아침 7시에는 일이 없는 사람도 나가야 했는데 나는 서울시와 연계하는 공공근로를 했어요. 대형버스 열 대가 한꺼번에 사람들을 실어 날랐어요. 경기도 벽제 화장터에서 쓰레기를 주웠지요.”
[[ 자활에 성공한 노숙인도 불황이 오면 다시 거리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처: 가나안노숙인쉼터 ]]
알코올 중독과 노숙으로 시설 입소와 퇴소 반복
주 5일 동안 일하면 금요일 저녁에 12만7000원쯤 들어왔다고 합니다. 석 달 뒤 김씨는 시설을 나왔습니다. 돈이 들어온 금요일마다 도박을 하자고 유혹하는 동료들이 싫었답니다. “나는 술은 먹어도 경마나 인터넷 도박 따위는 쳐다보지 않았거든요”라고 하는군요.
한동안 누나 집에서 머물다가 “자립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글라이더 제작업체에서 일했습니다. 숙소는 여관으로 정했습니다. 비수기가 되자 일거리가 떨어졌고, 김씨는 여관을 나와 다시 길바닥으로 갔습니다. 노숙 생활은 경기도 성남에서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곳에서 ‘포스’ 강한 노숙인들을 만납니다.
“삼십 여 명이 노숙을 했는데 그중 일고여덟 분은 15~20년 동안 근방에서 거리 생활을 했대요. 자기 구역도 갖고 있었어요. 한여름 밤에는 학생 체육관 뒷문으로 들어가 에어컨 바람을 쐬며 잤고, 샤워도 했어요. 근처 아파트의 옷 수거함에서 이불과 신발 따위를 가져왔고, 병원 영안실에서 술과 담배도 얻었지요.”
우연히 거리의 터줏대감들과 친해진 김씨는 함께 어울려 다녔습니다. 대부분 전과자였고 가끔 행인들의 주머니를 슬쩍하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야구장에 한데 몰려가 무단으로 경기를 관람하고, 라커룸에서 프로야구 선수와 인사해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겨울에는 텐트를 준비하고 몰래 전기를 따와 내부를 밝혔습니다.
마음껏 술을 먹은 김씨는 점차 알코올 중독에 빠져들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인력사무실을 찾았습니다. 에어컨도, 샤워도, 무료 야구 관람도 돈을 벌고 싶다는 욕구를 해결하진 못했습니다. 몇 달 지나자 일거리가 떨어져 성당에서 밥을 얻어먹었다고 합니다. 2004년 막막하던 김씨는 새로운 쉼터를 찾습니다.
[[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을 하는 장면. 출처: 노숙자 무료급식소 ]]
술 때문에 자립 실패
“그해 8월에 입소해 2005년 말에 재활교육을 수료했어요. 다음 2년 동안 자립을 위한 예비 교육도 받았지요. 과정이 끝나고 쉼터 근처에 방을 얻고 취직을 했어요. 거의 한두 달 만에 (자립 생활이) 깨졌어요. 술 때문에.”
오랜만에 개인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술의 유혹을 참지 못했다고 합니다. 쉼터에서는 “다시 입소하라”고 했지만 김씨는 거절했습니다. 자존심 때문이었답니다. 다시 누님 집으로 들어갔지만 술은 끊지 못했습니다. 몇 달 만에 식구들과의 불화로 집을 나온 김씨는 사나흘간 사우나에서 지내다가 다시 쉼터로 연락했습니다.
2008년 6월 재입소한 김씨는 당시의 일을 후회합니다. 자립은 단순한 경제상의 독립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기도 한데, 자신은 무조건 가족한테만 의지하려고 했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지금은 쉼터의 단주 모임에서 많은 얘기를 합니다. 여기 출신으로 자립에 성공해 열심히 생활하는 분이 있어요. 술도 6~7년간 끊었고, 막노동을 열심히 하다가 일산에 세탁소를 차린 분이에요. 그 분과 함께 일요일마다 축구를 하며 깨달은 게 상당해요.”
금주에 노력하는 김씨에겐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모든 과정의 재수료를 앞두고 있지만 취직할 자리가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쉼터와 연계한 회사는 경기 불황으로 구조조정 중이라고 합니다. 일자리가 날 때까지 김씨는 여러 회사를 알아보고 끈질기게 기다릴 작정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솔직히 내가 이런 말을 하면서도 또 넘어지지 않는다는 법은 없습니다. 알코올 중독이란 10년간 술을 끊어도 한 잔 마시기 시작하면 끝장일 수 있거든요. 다시 술을 마시는 분도 봤고, 저 역시 한 번 넘어졌습니다. 그럴수록 확고한 의지가 생깁니다. 실패의 경험 때문에 마음가짐이 더 새로워지고 강해지죠.” <끝>
※ 희망인프라 블로그를 운영 중인 사회투자지원재단은 지난해 ‘노숙인·부랑인의 자립자활을 위한 감정적 임파워먼트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그때 만난 김씨의 사연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들의 재기·재활을 위해 마음의 치료가 다른 지원과 함께 이뤄져야 함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2009년 12월28일(월요일)
‘희망인프라’ 사회투자지원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