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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 기획취재 5회] 도시를 지탱하는 힘, 호주 브리즈번, 시드니 레츠

사회투자지원재단 2014. 4. 15. 11:50

 

 

 

세계 최초로 지역화폐, '레츠'를 시작한 곳은 캐나다지만 세계 최대 규모의 레츠가 활성화된 곳은 호주다. (옥천신문 1218호 2014년 1월10일. 지역을 살리는 공동체 화폐 '레츠' 아직도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십니까? 기사 참조). 호주에서는 한 때 200개가 넘는 지역에서 레츠가 활발히 이뤄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드니 서부의 블루 마운틴 지역에서는 회원수가 2천명이 넘는 '블루 마운틴 레츠'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지금 호주에서는 50개 안팎 지역에서 레츠가 이뤄지고 있다. 옥천신문은 지난해 10월 호주를 방문해 호주 최초로 레츠를 도입한 말레니와 시드니, 브리즈번 등을 취재했다. 오페라 하우스와 캥거루, 코알라로 유명한 나라 호주. 호주의 레츠는 어떤 모습일까. 이번 호에서는 시드니 레츠와 브리즈번 레츠 사례를 살펴본다.

취재지원: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연합기획취재단: 옥천신문, 용인시민신문, 남해시대신문, 태안신문, 해남신문, 사회투자지원재단>

 

 

 

 

■ 다른 삶은 가능하다.

#1. 조앤은 아이가 학교를 가기 시작하면서 육아와 생계를 함께 하기 위해 파트타임으로 직업을 바꿨다. 하지만 파트타임으로 버는 돈은 아이를 돌보는 비용에만 충당하기에도 빠듯했다. 그녀는 레츠에 가입하고 난 후에 아이를 방과후학교에 보낼 수 있었고 레츠로 값을 지불했다. 그녀는 집에서 한 요리를 이웃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오페라'(시드니 레츠에서 사용하는 지역화폐 단위)을 얻었다.

#2. 데이비드는 세르비아에서 호주로 이주했다. 어렵게 공동주택을 구했지만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를 들여놓을 돈조차 없었다. 그의 집주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레츠를 나누어 주었고 다른 회원들에게도 데이비드의 사정을 얘기했다. 얼마 후 데이비드는 1천 오페라를 얻게 됐고 이것으로 필요한 가구를 구입했다. 몇 달 후 그는 이웃들의 잔디를 깎는 것으로 오페라를 갚아 나갔다.

#3. 제니는 스키를 타다가 등을 다쳐서 직장에 병가를 냈다. 그녀는 뼈를 맞추는 치료를 해야했지만 일반 병원에서 치료 받을 여력이 없었다. 제니는 레츠를 사용할 수 있는 대체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았고 얼마 뒤 일터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후 제니는 베이비 시터를 하거나 안 입는 옷을 팔아 마이너스였던 레츠를 갚아 나갔다.

#4. 미혼모인 마디는 딸과 함께 6주 동안 남호주를 둘러보는 여행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숙박비를 내지 않았다. 호주에 있는 다른 지역 레츠에 연락해 오페라로 숙박비를 지불할 수 있는 곳들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5. 피터는 실직과 이혼의 고통 속에 삶의 끈을 놓으려고 했다. 심한 우울증을 앓은 그에게는 상담이 필요했지만 그럴 만한 돈이 전혀 없었다. 레츠에 가입하고 난 후 침술을 하는 회원을 만났고 침술사는 끈기있게 피터를 치료하고 그의 말벗이 되어 주었다. 물론, 돈은 한 푼도 들지 않았다. 피터는 레츠에 '자기 삶을 빚졌다'고 말하며 지금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자조모임에서 멘토일을 하고 있다.

#6. 세인트 존 초등학교에서는 구내식당 근무당번을 할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는 자원봉사자들에게 레츠로 보수를 주기 시작했고 아이들에게는 레츠로 학교급식비를 지불할 수 있게 해주면서 더 이상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어졌다.

이상에서 나열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시드니 레츠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회원들의 실제 이야기다. 레츠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며 지역사회를 바꿔나가는 지 위 사례들은 잘 보여준다.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재정적, 정신적, 신체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은 잘못된 것이다. 레츠는 이런 '믿음' 위에 우리가 잃어버린 '관계'의 따뜻함을 상기시키고 '지역'을 디딤돌 삼아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

 

 

■ 삶의 약한 고리 채우는 연대의 힘

시드니 레츠는 지난 2003년 5명이 모여 시작했다. 2008년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는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돈이 아닌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며 시드니 레츠로 모여들기도 했다. 지금은 235명이 활동하고 있다. 거래 단위는 시드니의 대표적 상징물 '오페라 하우스'를 따 '오페라'로 정했다. 1오페라는 통상 1호주 달러로 통한다. 공동운영자 중 한 사람인 다이아나씨는 한 달 평균 50건 정도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다이아나씨는 "시드니 레츠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장애가 있거나, 직업이 없는 사람, 또는 현직에서 물러난 뒤 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라며 "시간은 많은 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레츠를 권한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금으로는 집세나 식비 일부만 충당되고 나머지 생활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레츠는 이런 삶의 약한 고리들을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힘으로 채워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때문에 활동보조나 돌봄서비스 같은 영역과 관련된 서비스가 많이 있다. 레츠를 통하게 되면 돈이 없어도 필요한 물품이나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심지어 마이너스 거래도 가능하다.

일단, 내가 필요한 것을 이웃들에게 받으면서 마이너스 거래를 한 뒤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그때부터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갚아나가면 된다. 레츠에서는 아무도 왜 그렇게 마이너스가 많으냐고 나무라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돈 없는 사람이 과소비를 하면 정신나간 사람 취급 받지만 레츠에서는 그렇지 않다. 다이아나씨는 "현실에서는 과소비를 지양하지만 레츠에서는 마이너스가 되더라도 가급적 더 많은 '거래활동'을 권장한다."고 말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지역사회에 정착하지 못하는 것보다 이웃들의 도움으로 얼마간 자립의 시간과 경제적 여유를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지역사회에 필요한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 사람이 도움을 받는 사람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노후 대책으로 활용되는 레츠

 

브리즈번 레츠는 25년 전에 시작됐다. 처음에는 종이에 거래내역을 일일이 적었지만 지금은 시이에스(CES:  Community Exchange System)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덕분에 지역에 머물러 있던 레츠가 호주 전역은 물론, 전세계 다른 국가 및 지역 레츠와 쉽게 결합되고 있다. 이는 브리즈번 레츠와 시드니 레츠가 마찬가지다.

두 레츠는 작동 방식이 거의 비슷하다. 한 달에 한번 우편으로 각 회원들에게 거래 가능한 레츠 물품 및 서비스를 제공한다. 상품 카달로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동시에 인터넷으로도 이를 알려준다. 가끔은 벼룩 장터 같은 것을 열어 거래를 활성화 시킨다. 브리즈번 레츠 전체 회원은 500명 안팎인데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들은 절반 정도 된다. 레츠 단위는 '유닛'이다.

    

브리즈번 레츠에서 가장 인기있는 상품은 마사지, 음식(요리), 정원 관리, 교통 편의 제공 같은 것들이다. 가격은 거래 하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합의하는 방식이다. 동일한 거래도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이 가면서 관계가 좋아진 이웃들끼리는 무료로 이뤄지기도 하지만 거만하고 불손한 사람은 거래 자체가 줄어든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자신이 제공하는 물품이나 서비스의 품질을 유지한다. 상품 구매 후 별점을 매기듯 거래 건수 자체가 그 사람의 평판이 되는 셈이다.

 

15년 전 정부연구원에서 은퇴한 아드리안씨는 4년째 브리즈번 레츠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레츠를 이용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아드리안씨는 "레츠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이 있고 그냥 궁금해서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그중에는 노후 대비용으로 '유닛'을 열심히 모아 두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브리즈번 레츠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 노후 대비용인데, 실제 브리즈번 레츠를 많이 이용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회생활에서 물러난 은퇴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열심히 레츠 활동을 해서 유닛을 모아둔다. 아드리안씨 역시 자신의 계좌에 1만1천 유닛을 쌓아놓고 있다. 연금을 모으듯 차곡차곡 유닛을 쌓아둔 뒤 늙거나 다쳤을 때 그것을 활용해 필요한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받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레츠는 필요한 상황과 사람에 따라 그 쓰임이 달라지기도 한다.

브리즈번 레츠는 앞으로 회원 규모나 활동 폭이 더 넓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 등 기술이 발전하면 사람들에게 더 쉽게 레츠를 알리고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기 때문이다.

 

브리즈번 레츠 창립 멤버인 마이클씨는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레츠도 인터넷 쇼핑몰처럼 사람들이 이용하기 더 쉽게 변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중요한 것은 새로운 회원들이 더 열성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회원들이 자신이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 지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본기사는 옥천신문의 동의하에 중복게재 한 것입니다. 일부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