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경제 소식들

한 달에 3000만원 벌던 남자의 추락

사회투자지원재단 2010. 1. 18. 10:35

한 달에 3000만원 벌던 남자의 추락

-

 

한 대기업에서 유통과 물류를 담당하며 지점장까지 올랐던 올해 40대의 정희도(가명) 씨는 IMF 당시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정리해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 자영업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맥이 넓은 정씨의 아버지는 레미콘과 시멘트 같은 건축자재 중개상을 하며 떼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5·6공화국 시절) 정부가 한강 종합개발사업과 주택 200만호 건설 사업을 하면서 시멘트와 레미콘 시장이 품귀 현상을 빚었어요. 공급업체에서 시멘트 한 포대당 1980원하던 것을 우리는 (건축자재를 중개하며) 2500원선에서 건설사에 넘겼지요. 건설회사 자재 담당하는 분들이 아침에 현금을 싸가지고 왔어요.”

 

건축자재 중개업부터 식당·술집까지 떼돈 벌어

 

새 밀레니엄이 멀지 않던 시절, 은퇴한 아버지를 대신한 정씨는 승승장구했습니다. 부친 때보다 이익이 확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벌어놓은 재산과 주변의 자금을 긁어모아 엄청나게 투자를 늘렸습니다. 사업이 승승장구하자 정씨는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다른 분야에도 눈을 돌렸습니다.

 

“서울 종로 바닥에 괜찮은 가게를 하나 얻었어요. 손 하나 대지 않았는데 첫 달 영업 이익이 1200만원쯤 떨어지더라고요. 10년 전의 일이에요.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서 가게를 세 개까지 늘렸어요. 철판구이집, 바, 실내 주점이었죠.”

 

가장 잘된 실내주점의 경우 평일 매상이 200만원~250만원, 토요일과 일요일엔 400만원~500만원이었다고 합니다. 주말에는 신용카드 매출을 빼고 현찰로만 300만원을 챙겼다는군요. 건설중개업체와 가게 세 개를 합쳐 한 달 수입이 3000만~4000만원은 됐다고 봐야겠죠. 정씨는 “참 열심히 살았다”고 회상했습니다.

 

“직원이 네다섯 명, 아르바이트생이 열다섯 명 되는데 가게 안은 전쟁터에요. 장사가 끝나는 새벽에는 주방에서도 설거지거리가 감당이 안 되니까 그릇이며 접시를 화장실 쪽 복도까지 쫘~악 늘어세워요. 난 종업원들 퇴근시키고 새벽 다섯 시부터 서너 시간 동안 혼자서 설거지를 다해요.”

 

 

 

 

사업 대박으로 생겨난 허영심

 

처음엔 성실하던 정씨도 사업이 대박을 치자 차츰 허영심이 늘었습니다. “‘나보다 못 버는 사람도 외제차 끌고 다니며 잘 사는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며 “돈을 벌면 그만큼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자꾸 외형 확대에만 신경 썼다”고 합니다. 새로 점포를 열고 연달아 업종을 바꾸고 다시 인테리어를 하는 과정이 반복됐습니다.

 

2002년쯤 정점을 맞은 정씨의 사업은 2~3년 뒤부터 고비를 맞습니다. 건설중개업에서 몇 차례 부도가 나면서 “완전히 망가졌다”고 합니다.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 쓰다 보니 3개월 동안 고리사채를 2억5000만원이나 빌렸습니다. 나중에는 가게 보증금도 못 챙길 만큼 돈이 달렸습니다. 정씨는 이렇게 후회합니다.

 

“처음 부도가 났을 때 나는 외국에 있었어요. 사업 동료들과 함께 외국에서 관광하고 돈을 쓰며 다니다가 부도 통보를 받았죠. 그때 바로 들어와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데 큰돈이 아니라는 판단에 일정을 다 마치고 귀국하기로 했죠. 경영하는 사람이 그런 정신 상태였으니 뭘 똑바로 했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돈을 받아야 할 곳은 지급을 제때 해주지 않았습니다. 전 재산을 정리한 정씨는 일어설 힘이 없었지만 여전히 육억여원의 채무가 있었습니다. 사채업자들이 집에 찾아오자 아내와 아이는 처가로 피신했습니다. 정씨의 아버지가 재산을 처분해 상당한 채무를 해결했지만 아직 정씨에게는 많은 빚이 남아 있습니다.

 

“처음부터 아버지에게 애원했으면 살려주셨을 거예요. 그러면 이혼까지는 가지 않았겠죠. 나 혼자 해결하겠다고 버틴 아집 때문에…. 재산을 정리한 뒤에는 수중에 있는 돈 얼마로 죽기 전까지 술을 먹기로 했어요. 친구 가게에서 두세 달 동안 매일 술을 마셨어요. 망한 처지지만 소주는 안 먹고 양주만, 하루에 한두 병씩…”

 

수영 핑계로 유서 들고 한강 찾아가

 

그해 겨울날, 돈이 떨어진 정씨는 소주 여덟 병을 마시고 한강변으로 찾아갔습니다. “수영이나 하자고 마음먹었다”며 그 추위에 물가로 향했습니다. 주머니엔 유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한강물이 얼어 있었고, 돌멩이를 던져도 잘 깨지지 않았습니다. 마침 근처에서 훈련하던 군인들이 다가와 정씨를 말렸다고 합니다.

 

그 뒤 정씨는 한 노숙인 쉼터에 들어가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습니다. 금융권 채무에 보증인까지 있어서 개인파산제도를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지만, 현재의 정씨에겐 개인파산제가 최선의 방법일 것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씨의 말입니다.

 

“남들은 이 정도 처지에 오면 우울증에 걸린다는데 나는 다른 것 같아요. 한강변에 가서 소주 한두 병 원샷하고, 소리 한 삼십 번 정도 지르고, 딸아이 생각하면서 눈물 한 번 딱 흘리고 쉼터에 돌아와 샤워하고 나면 다음날 또 정상적으로 일하죠.”

 

추운 날씨입니다. 강추위에 한강이 얼어붙었다지만 언젠간 다시 물결치겠지요. 정씨의 신세도 봄날 얼음 녹듯이 스르르 풀릴 날이 올까요. <끝>

 

※ 희망인프라 블로그를 운영 중인 사회투자지원재단은 ‘노숙인·부랑인의 자립자활을 위한 감정적 임파워먼트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그때 만난 정씨의 사연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들의 재기·재활을 위해 마음의 치료가 다른 지원과 함께 이뤄져야 함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2009년 1월18일(월요일)

‘희망인프라’ 사회투자지원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