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경제 소식들

<기획취재-지역순환경제를 만드는 씨앗 '공동체 기금'(2)> 금융을 넘는 마을 만들기 - 논골신용협동조합

사회투자지원재단 2015. 9. 8. 15:10

 

 

2회 : 금융을 넘는 마을 만들기 - 논골신용협동조합
3회 : 자본의 독점을 넘는 신뢰의 공유 - 공동체은행 빈고
4회 : 실업을 해결하는 연대의 손길 - 취업상조회 디딤돌신용금고
5~6회 : 인구 4만7천, 빈민촌의 기적 - 브라질 최초 공동체 은행 파우마스

취재지원 :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사회투자지원재단
 

5~6년전 쯤으로 기억한다. 기자가 모 신협을 찾아 조합원으로 가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문의한 적이 있었다. 창구에 있던 직원은 무심한 말투로 "출자금 내고 통장 만들면 된다"고 짧게 안내해줬다. 1만원을 냈고 바로 통장이 나왔다. 신협 조합원이 되는데는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신협이 어떤 곳인지 설명해주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신협이라는 줄임말이 아니라 신용협동조합이라고 해야 한다'는 논골신용협동조합 유영우 이사장의 말은 새롭게 와 닿았다. 신협이라는 간편한 줄임말은 신용협동조합이 추구해야 할 '자조·자립·협동'의 근본정신을 증발시켜버렸다. 근본정신이 사라진 신협은 더 이상 지역사회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다. 그저 많은 금융기관 중 하나일뿐이다. 지역과 함께 해야 한다는 연대의식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신협뿐만 아니라 마을금고, 농협도 마찬가지다. 논골신용협동조합은 이들과는 정반대의 길, 원래 신협이 가야할 길을 걸어왔다. 지역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하고 실천한다. 생협을 키워내고 마을기금을 만들고 지역 안팎의 사회적경제를 엮어내는 일에도 열심이다. 그 뿌리는 1993년 불붙기 시작한 재개발 반대 철거민 투쟁에 있었다. 

 

 
▲ 1997년 송학마을 주민회관에 작은책상을 놓고 직원 한명으로 시작한 논골신협이 지금은 5명의 상근자가 근무한다.


■ 빈민, 철거투쟁, 그리고 신용협동조합

논골신용협동조합(논골신협, 이사장 유영우)이 있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 행당동, 하왕십리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빈민지역, 산동네였다. 1993년 아파트를 짓기 위한 재개발 바람과 함께 원주민들을 밀어내기 위한 철거 사업이 시작됐고 이에 맞서 주민들은 생존권과 주거권을 지키기 위한 힘든 싸움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다른 철거 지역과는 달리 '가이주 단지'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가이주 단지란 재개발 완료 후 임대 아파트에 들어가기 전까지 주민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시설과 공간을 말한다. 주민들은 가이주 단지에서 4년을 함께 보내며 공동체 운동의 중요성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1994년 '주민협동공동체실현을 위한 금호행당하왕지역기획단(기획단)'이라는 긴 이름의 주민자치 조직을 만든다. 기획단은 다시 경제협동분과·생산협동분과·생활협동분과·사회복지협동분과로 나뉘고 경제협동분과가 1997년 논골신협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주민들은 각 마을마다(6개 임시거주시설) 출자위원을 정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3년간 몇 백원에서 몇 천원씩 출자금을 모았다. 신협을 만들기 위해서는 3억원의 출자금이 필요했는데 주민들은 철거 싸움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매일 출자금을 모았고 이렇게 마음을 합한 이들이 500여명에 달했다. 이들 대부분은 건설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파출부, 가내수공업 등 불안정한 생계수단으로 늘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왔다. 병원비, 교육비 등 급전이 필요할 때 제도권 은행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어쩔수 없이 고금리의 사채업을 끌어다 쓰면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하지만 논골신협의 탄생은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계기가 됐고 더 나아가서는 개인적 차원이 아닌 지역사회가 협동과 연대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구축하는 전환점이 됐다.

유영우 이사장은 "빈민촌 주민들은 경제적 자립도가 매우 낮았지만 '협동조합'이라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스스로 판단해 신협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1인은 만인을 위하고, 만인은 1인을 위한다는 협동조합 이념이 산동네를 변화시킨 것이다.

■ 주민협동공동체를 지향한 이상한 신협

임시거주시설 중 한 곳인 송학마을 주민회관 한쪽에 책상 하나를 놓고 시작한 논골신협은 현재 3층짜리 건물을 가진 번듯한 기관으로 성장했다. 그 사이 3억원의 종자돈은 268억여원의 자산규모로 불어났다. 조합원 규모도 4천134명으로 커졌다.(2014년 12월31일 기준). 덩치가 커진 만큼 지역사회에서 역할도 많아졌다. '옷과 사람들'이라는 노동자생산협동조합 설립을 위해 출자금과 운영자금을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논골신협은 창립과 함께 주민협동공동체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었다.

성동두레생협을 만들기 위해 직접출자를 하고 조합출자금을 대출해줬다. 생협 초기에는 논골신협 건물 내 판매공간을 무료로 내줘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지원했다. 하늘나무사랑방이라는 주민 모임을 지원하고 블랙앤압구정이라는 노동자협동조합 중국집을 만들기 위한 출자금을 대출해줬다. 창립 초기부터 매년 일정액을 논골기금이라는 이름으로 적립해 다양한 지역사업에 쓰고 있고 논골두레장학회를 설계했다. 논골두레장학회는 논골신협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문호를 개방해 성동지역사회장학회로 커졌다. 지난 2013년부터는 성동협동기금이라는 사회적경제 지원을 위한 시민사회기금을 조성하는데도 힘을 쏟고 있다. 성동협동기금은 논골신협을 비롯해 서울시사회투자기금, 성동기금, 성동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회적경제 당사자들의 기금을 한데 모을 예정이다.

기금 사업 외에 지역사회 지원도 다양하게 진행한다. 논골신협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획단은 이후 성동주민회라는 주민자치조직으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데 여기에 매년 일정액을 운영비로 지원하고 있다. 이 밖에 평화의 집, 청소년 공부방, 논골주민문화한마당을 지원하고 최근에는 치과의료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드는데 대출을 지원하고 조합원 모집도 함께 하고 있다. 단지 금전적인 방식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성동주민회, 논골마을위원회, 성동주민자치소통센터, 성동협동사회경제추진단, 주거복지센터 등 지역사회 여러 기관, 단체와 함께하는 '지역사회 논의·협의 구조'에도 적극적으로 결합한다. 이런 다양한 방식의 지원과 참여로 성동지역 주민운동, 공동체 운동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논골신협은 왜 이런 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할까?

유영우 이사장은 "논골신협은 단순한 금융기관이 아니라 지역주민운동 차원에서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것이고 성장하는 것이 그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조합원 확대와 참조합원의 문제

그렇다고 해서 논골신협의 앞날이 밝은 것만은 아니다. 창립 초기에 비해 지역주민의 80%가 달라진 상황은 논골신협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 초기 논골신협은 조합원 교육을 받지 않으면 조합원으로 가입하지 못할 정도로 '멤버십'이 강했다. 하지만 논골신협의 성장과 함께 조합원 수가 늘어나자 이런 1대1 조합원 교육과 관리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이후 일주일에 한번씩 신입 조합원을 모아 교육을 하거나 신협 창구에서 직원이 직접 조합원 교육을 하고 의무적으로 교육 동영상을 시청하게 하는 방법도 써봤다. 최근에는 논골신협을 소개하는 책과 함께 질문지를 주고 답안지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면 선물을 주는 당근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회수율은 20% 정도에 불과하다. 4천명이 넘는 조합원의 양적 성장 뒤에는 이런 근본적인 어려움이 숨어있다. 논골신협은 4천명의 조합원 중 신협 정신에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는 참조합원을 따로 관리하는데 2014년은 164명으로 자체 집계했다. 참조합원을 늘리는 것이 논골신협의 가장 큰 숙제다.

유영우 이사장은 "지난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 때 논골신협에서도 한꺼번에 예금이 많이 빠져나간적이 있는데 그만큼 참조합원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의 반증"이라며 "조합원들을 더 자주 만나서 참조합원으로 만들고 지역사회 여러 기관, 단체들과 끈끈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참조합원 문제와 함께 논골신협이 처한 또하나의 위기는 지역 상권의 급격한 몰락이다. 이마트, 롯데마트, 엘지마트 등 대형마트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기존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 지역의 자영업자들은 논골신협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골목상권의 몰락은 신협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대한 논골신협의 해법은 '신협 운동의 본래 정체성과 목적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다른 금융기관과 분명한 차별성이 있는 방법, 지역사회에 더욱 밀칙한 관계망을 두텁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신협은 단순히 생활자금을 제공하는 기능을 넘어 취업 알선기관, 직업능력개발 및 교육기관, 창업지원기관, 지역신용보증기관 등과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해 지역종합금융기관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한 구체적 실천 방법 중의 하나가 협동조합을 비롯한 지역사회 사회적경제를 튼튼히 하는 것이다.

유영우 이사장은 "어차피 신협이 1금융권과 경쟁해서 살아남을 수는 없다. 자산 규모부터 차이가 많이 나고 여수신, 금리 경쟁도 가능성이 낮다. 결국은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게 유일한 대안이다. 특히, 사회적경제라는 새로운 시장은 신협에 기회가 될 수 있다. 지금은 그 규모가 손톱만해 보여도 앞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또 신협이 협동조합 선배로서 의도적으로 그 시장을 키워야 할 책임도 있다."고 말했다.

 

 

   
▲ 블랙앤압구정 채 혁 대표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되는 중국집 블랙앤압구정 '

채 혁 대표의 변화는 극적인 것이었다. 그 자신도 변화의 이유를 깔끔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필'이 꽂혔다는 것 외에는. 하지만 이어진 설명에서 그 변화의 동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역에 대한, 지역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채 혁 대표는 한때 사업이 망해 가족을 데리고 빚쟁이들을 피해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지금은 17년째 대박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중국집 '블랙앤압구정' 1, 4호점을 운영하고 있다. 블랙앤압구정 2, 3호점은 채 대표가 데리고 있던 직원들이 독립해 차린 가게다. 가게가 만들어진 과정이 재밌다. 채 대표는 2007년 논골신협 조합원 자격으로 일본 마을 만들기 견학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 오사카의 한 마을, 협동조합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고향을 떠났던 청년들과 주민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또 새로운 이웃들이 생기면서 마을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채 대표는 10여년 중국집을 운영하며 자신의 손을 거쳐간 200여명의 직원들이 생각났다. 대부분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거나 20대를 방황으로 보낸 청년들이 많았다. 이 견학을 계기로 채 대표는 30여곳의 협동조합 강연장을 쫓아다녔고 자신의 가게를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하기로 결심했다. 중국집은 원래 이직률이 높다. 특히,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젊은 청년들의 이직률이 높았다. 채 대표는 2~3년간 성실히 근무하면 출자할 자격을 줬다. 이 자격은 논골신협에서 대출 받을 수 있는 자격으로 이어졌다. 출자할 직원들은 매달 월급 이외에 배당을 받는다. 전달 가게 전체 매출을 직원수로 나눠 현금 배당을 한다. 이직률은 급격히 낮아졌다. 채 대표 표현을 빌리자면 '이젠 나가라고 때려 죽여도 안 나갈' 정도로 가게에 대한 애착이 깊어졌다. 비록 채 대표가 가져가는 수익은 이전의 40%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가게 전체 매출은 15% 올라갔다. 채 대표는 "우리 식구(직원)들이 그만두지 않을 방법을 고민하다 협동조합을 알게 됐고 그 방법을 실천하니까 직원들이 자기 가게도 차릴 정도로 열심히 하고 결혼하고 애도 낳더라"며 "2020년까지 성동구에 총 7개의 블랙앤압구정을 오픈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2017년에는 블랙앤압구정 1호점을 확정 이전하기 위해 건물도 이미 봐뒀다. 그곳에 블랙앤압구정의 역사를 스토리텔링할 생각에 채 대표는 기분이 좋다. 협동과 연대로 만들어온 철가방의 위대한 역사가 기대된다.

   
▲ 성동두레생협 장해영(왼쪽) 사무장과 이현옥 이사장이 생협 매장에서 안내 책자와 매실을 들어보이고 있다.

'산동네서 꽃피운 또하나의 기적 성동두레 생협'

주민협동공동체실현을 위한 금호행당하왕지역기획단이 만든 것은 논골신협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획단 산하 경제협동분과가 신용협동조합 창립으로 이어졌다면 생활협동분과는 성동두레소비자생활협동조합(생협)으로 연결됐다. 이 지역에서의 생협은 독특한 의미가 있다. 생협은 일반적으로 중산층들이 하는 운동, 즉 여유있는 사람들의 운동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가난한 산동네에서 생협이 가능하리라 생각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논골 주민들은 생활협동분과 활동을 시작한 이래 '생명'과 '살림'이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많은 고민을 했고 2007년 논골신협의 한쪽에 작은 매대를 설치함으로써 오래된 꿈을 이뤄냈다. 논골신협은 지역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고 변화도 이뤄냈지만 신협이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협과는 또다른 역할이 생협에 주어졌고 주민들은 철거반대투쟁을 할 때처럼, 신협을 만들 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생협을 조금씩 키워갔다. 작은 매대가 만들어진지 5년만에 창립총회를 거쳐 법인을 만들었고 두레생협연합에 가입했다. 2013년에는 신협에서 3분 거리에 있는 새로운 매장으로 확장이전했다. 생협은 490명의 조합원과 3명의 상근자가 있다.(2014년 4월 기준). 하루 10만원도 되지 않던 매출이 1천300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어르신 국수잔치, 이웃을 위한 반찬봉사, 청소년 장학사업 활동, 성동마을넷 네트워크 만들기 등을 활발히 이어오고 있다. 생협 이현옥 이사장은 "빈민 지역에서는 생협이 어려울 거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고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결국 주민들이 해냈다"며 "신협은 신협대로 생협은 생협대로 역할을 하면서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글 : 정창영 기자 (옥천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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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옥천신문의 동의하에 중복게재 한 것입니다. 일부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