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희망이야기

복지국가 단상(斷想)

사회투자지원재단 2012. 7. 11. 15:43

 

 

 

 

신 명 호(사회투자지원재단 사회적경제연구센터 소장)

 

 

 

 몇 해 전부터 유행하고 있는 네티즌들의 신조어 가운데 ‘엄친아’, ‘엄친딸’이란 게 있다. 나의 분발을 자극하기 위해 엄마가 늘 비교의 대상으로 들이대는 ‘엄마 친구 아들이나 딸’의 줄임말로, 무엇이든 잘하고 완벽한 조건을 갖춘 이상형의 남녀를 뜻한다고 한다. 잘난 사람을 닮으려고 노력하라는 선의의 지청구라고는 하지만, 기실 엄친아(딸)를 바라보는 보통 아들(딸)의 심정은 그저 막막하고 답답할 따름이다. 닮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도달해야할 목표가 너무 아득해서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고 요령부득인 까닭이다.
 스웨덴 같은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을 볼 때마다 드는 느낌이 꼭 이와 같다. 전에 그런 나라들의 자료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도 그러했거니와, 이번에 8박9일의 일정으로 돌아본 스웨덴 견학의 초반 느낌도 바로 그런 막막함이었다. 
 18명의 어린이를 6명의 보육교사가 돌본다는 탁아소를 돌아보면서, 이런 운영체제가 도대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직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는 머리띠를 두르고 싸우는 대신 생계비를 보장 받고 무료로 대학을 다니면서 새로운 직업을 찾는다는 대목에서는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이처럼 복지강국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이 노동자의 80%를 포괄하는 노조의 높은 조직률과 그것을 기반으로 사회민주당이 장기집권을 한 데 있었다는 사실은, 부자 정당에 표를 던지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현실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뜯어보니 그들에게도 우리와 비슷한 시절이 있었다. 스웨덴 복지모델의 단초가 되었다는 사민당 당수 한손(Hanson)의 유명한 (1928년) 의회연설은 사실상, 부자와 빈민, 자산가와 가난한 노동자, 기득권자와 권리를 빼앗긴 자들이 극명하게 나뉘고, 게다가 가진 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의 비참한 삶을 냉랭하게 외면하던 당시의 현실을 질타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또 1931년에는 노동자 시위대를 향해 군대가 발포를 해서 5명이 숨지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복지국가의 건설이란 ‘더욱 민주화된 사회를 만드는 것’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완성된 꼴이 있을 수 없고 민주화의 경로가 하나가 아니듯이, 복지국가에도 최종의 목표란 게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란 사람들이 정의로운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정의로운 행동을 해야 할 이유와 사람들은 존재한다.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 한, 자본과 권력의 억압은 언제나 존재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자면 민주주의는 어느 시점에서도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자본과 권력에 맞서 싸우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늘 현재진행형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욱 민주화된 사회를 만드는 것이 그만큼 소외된 사람들이 줄어든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스웨덴에서 포럼에 참가하는 동안, 스톡홀름에서 배로 3시간 거리에 있는 인구 5만7천의 고틀란드 섬에서 얼마 전 7천명의 주민이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육지와 섬을 왕래하는 배의 운임이 너무 비싸니 그것을 낮춰달라는, 정부를 향한 일종의 항의 시위였다고 한다. 오늘날 그들 주민에게는 높은 배 삯을 낮추는 것이 보다 평등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해결해야할 당면의 과제였던 셈이다.
 그래서 스톡홀름을 떠나올 때쯤에는, 그 곳 북유럽 사회와 우리나라 현실의 크나큰 격차에 한숨짓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정치적 현실과 조건 속에서 보다 민주화된 사회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복지사회는 국민소득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현재 우리의 수준에서 ‘더불어 사는 삶’을 확장함으로써 조금씩 구현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