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희망이야기

행복한 경제를 만드는 협동조합운동

사회투자지원재단 2012. 5. 15. 09:49

행복한 경제를 만드는 협동조합운동

 

장원봉(사회투자지원재단 상임이사)

 

지난 2011년에 한살림서울의 지역살림정책회의에 참가했다. 그 모임에서는 한살림이 추진하고 있는 지역살림운동을 어떻게 조합원들과 함께 할 것인가를 주되게 논의했다. 친환경식자재를 구매하는 생협을 넘어서 일상적인 생활의 필요를 협동조합의 관계 속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지역살림운동의 생각인 것 같다. 몇 차례 한살림 조합원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한살림 조합원에게서 구매생협을 넘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끔씩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의 필요를 시장 구입을 통해서 충족하는데 익숙해온 조합원들이 한살림 매장에서의 구매행위를 시장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행위와 어떻게 차별화시키고 있을까? 더군다나 구매를 넘어선 생활의 필요를 협동조합의 관계 속에서 충족하고자 하는 시도를 정말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은 지역살림정책회의를 참가하는 내내 해결되지 않았다. 협동조합은 정말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보이지 않는 손’으로 시장기능을 역설한 애덤 스미스(Adam Smith)에 의하면, 우리가 푸짐한 저녁 만찬을 즐길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어부, 농사꾼 등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생산이 그저 자기 가족의 자급자족을 위한 것이었다면, 우리의 식탁 위에 그 음식들이 올라올 수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분명히 그들은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팔아야 했을 것이다. 여기에 시장의 명암(明暗)이 존재한다. 사실 시장은 소비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재화와 서비스가 교환되는 장이기도 하지만, 이윤동기에 의해서 작동되는 경쟁의 각축장(角逐場)이기도 한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의 자유로운 교환기능을 통해서 경제 주체들의 상호이익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자기조절 기능의 순기능이 아닌, 독과점으로 지향되어 있는 이윤극대화의 각축장이 되어 버렸다. 시장경제가 가지는 삶의 필요를 충족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자유로운 교환의 장으로서의 기능은 이윤의 극대화가 실현되는 한에서 가능한 것이 되었다. 이제 우리가 매일 기대하는 푸짐한 저녁식탁은 자본주의의 이윤동기가 충족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 되었다.

 

자유로운 이기심의 경쟁질서가 모두의 욕망을 효과적으로 충족시켜줄 것이라는 주류경제학자들의 가정은 온전히 신화가 되어버렸다. 그 신화의 정체는 이런 것들이다. 첫째 시장경제를 통한 상호이익은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완전한 정보의 공유가 전제된다. 그렇지 못하면 양자의 상호이익은 확인되지 못한다. 하지만 구매자가 자신의 욕구를 완전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상품에 대한 정보를 갖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판매자는 늘 자신의 이윤동기를 위해서 구매자의 상품구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보를 숨기려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정보의 비대칭성은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의 질을 위협하고 있다.

둘째, 시장경제를 통한 욕망의 실현은 모두에게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장경제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제약받지 말아야 한다. 시장경쟁에서 승리한 자는 더 많은 이윤과 시장을 확대함으로써 시장권력을 얻어간다. 시장경쟁의 승리자들은 이제 더 이상 자유로운 시장교환의 장에서 상거래를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권력을 실현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들어간다. 그들의 시장에서는 자유로운 수요와 공급이 작동하지 않는다. 소비자들의 구매가 판단되는 가격도, 가격을 결정하는 공급도 이들의 의해서 통제된다. 많은 대기업의 독과점과 대형할인매장의 횡포가 이것이다. 소수의 집단에게 집중된 시장권력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양을 줄여간다.

셋째, 시장경제는 투자에 대한 장기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보다는 단기순이익에 지향되어 있는 주주들의 가치에 더 민감하게 작동한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참여자들은 건전한 상호이익의 교환보다는 단기적인 이익을 위한 기회주의적인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장기적인 투자에 인색한 기업과 노동자들의 정리해고가 발표된 기업의 주가가 오르는 주식시장의 냉정함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시간도 함께 줄여간다.

마지막으로 시장경제는 구성원이 보편적으로 누려야 하는 공공재(public good)를 상품화시킴으로써 그것의 접근성을 제한하고 있다. 교육, 환경, 보건의료, 교통, 안전, 자연자원 등 공공의 이익과 직결되는 분야에서 생겨나는 상품화는 지불능력의 차이에 따라서 공공재로의 접근 가능성과 편익의 질이 결정되게 된다. 시장경제 체계에서 공공재는 지속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교육의 질은 부모의 경제수준에 따라서 차별적으로 제공되고,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은 철저히 환자의 지불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언제부터인가 물은 사먹는 것이 되었으며, 물의 맛은 자연과 가까울수록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가구소득에 비례하는 것이 되었다. 시장경제에 의한 공공재의 위협은 우리가 누려야 하는 행복의 전용 면적을 좁혀간다.

마음씨 고운 푸줏간 주인의 인심과, 팔팔한 생선으로 만선(滿船)이 된 어부의 기쁨, 그리고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약하는 땀에 젖은 농심의 소박한 이기심은 촌스러운 추억으로 남아버렸다. 시장교환을 통한 상호이익은 가능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그럼 협동조합은 시장경제에 대한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원래 경제란 용어는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세상은 돈벌이 경제의 시장권력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으며, 국민경제는 시장을 통해서 상호이익의 관계를 누리지 상실하게 되었다. 협동조합은 오랜 동안 경제의 사회적 기능을 위해 작동되어왔다. 경제에 의한 사회의 지배를, 경제에 대한 사회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시장경제에 도전해왔다. 생산자와 소비자,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정보의 격차를 이윤을 위한 기만으로 활용하지 않는 공동결정의 원칙을 만들어냈으며, 초과이윤의 배타적인 소유를 제한하는 이공동소유의 원리를 지켜나갔다. 또한 협동조합은 상호이익의 호혜 속에서 지속적인 신뢰를 통한 사회적 자본의 축적방식을 마련하였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필요를 스스로 자조할 수 있는 자율적인 생성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협동조합운동이 시장경제의 모든 기능을 대체하여 경제의 순기능을 온전하게 복원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국가의 재분배 기능을 부정함으로써 자급의 경제로 가자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단순히 시장의 가격신호에 의해서 등장하는 소비자나 선거철 자신의 권리를 타인에게 위임하는 유권자로서 자신들의 필요를 시장과 국가에게 의탁하는 나약한 사회에게 다시 경제에 개입할 수 있는 역량을 협동조합을 통해서 기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협동조합운동이 사회적 평등과 부의 재분배를 위한 정치적 저항으로부터 고립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이유이며, 시장의 귀퉁이에서 자립경제로 자족하는 소박함에서 벗어나 다양한 협력의 관계망을 지역사회에서 만들어가야 하는 이유이다.

협동조합이 지역사회의 필요에 대응하고자 하는 분명한 자기 목적을 가지고 시민사회의 주도성과 결속을 보장하는 실질적인 참여주의 실현할 수 있다면 다시 경제를 사회구성원들의 상호이익의 장으로 돌려놓게 되지 않을까? 이것이 행복을 계산하는 경제로 협동조합운동이 이끄는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