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경제 소식들

20년 노숙인 “정부 돈보다 일자리 원해”

사회투자지원재단 2009. 3. 16. 11:33

20년 노숙인 “정부 돈보다 일자리 원해”

 

서울역 주변의 한 고시원에서 지내는 장명환(가명·50대) 씨는 IMF 이전인 1990년대 초반부터 20년 가까이 노숙 생활을 했다. 그만큼 길거리 생활에는 도가 텄다. 젊었을 때는 큰 한식당의 주방장으로 지냈지만 지금은 하루 벌어먹기조차 힘들다. 한 지원단체의 자활사업에 참여해 월 40만원을 받으며 생계를 잇는다.

 

장씨는 타고난 말더듬 때문에 의사 전달이 어렵지만 의지는 확고하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정부가 베풀어 주는 돈이 아니라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라고 한다.

 

[[ 경제 위기로 노숙인의 수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절망 속의 노숙인들에게 자활사업, 숙소와 식사 제공 등 사회적 지원은 유일한 희망이다. ]]

 

10대에 가출 후 물건 훔치다 일약 주방장으로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4세 때 장씨는 몰래 집을 나왔다. 산을 세 개나 넘어 통학하는 남쪽의 시골 생활이 지겨웠다. 무작정 올라온 서울 용산역에서 한 깡패가 그를 끌고 갔다. 장씨는 한 달 정도 남의 물건이나 지갑을 훔치러 다녔다. 일이 싫다고 하면 매가 돌아왔다. 그때의 상처 자국이 아직 어깨와 두 다리에 남아 있다.

 

조직에서 탈출한 장명환 씨는 종로의 한 중국집에 취직했다. 10대 소년은 하루 12시간씩 접시를 닦으며 일하다가 피카디리 극장 뒤편의 3층짜리 한식당으로 옮겼다. 중국집보다 힘들지 않았고, 식당주인과 주방장과 종업원들도 장씨를 귀여워했다. 장씨는 양념 만드는 법, 고기 재는 법, 육회 써는 법 등을 착실히 배워갔다.

 

20대에 장씨는 주방장 보조로 승진했고, 30대 초반에 월급 250만원의 주방장이 됐다. 비슷한 시기인 1988년의 서울에서 어른 일반버스 요금은 140원이었다. 월급의 대부분은 저축에 들어갔다. 후일 노숙생활 중에 술고래가 되면서 체구까지 비쩍 말랐지만, 그때만 해도 장씨는 술을 몰랐고 몸이 좋았다고 한다.

 

몇 년 뒤엔 주방장 일을 그만뒀다. “주방 보조가 대들어서 싸웠는데 후배를 쫓아내기 싫어 내가 식당을 나왔다”고 장씨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동안 모은 돈은 부모님 치료비로 썼다”고 했다. 암에 걸린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지병에 시달리던 어머니와는 현재 연락이 끊긴 상태라고 한다. 몇 번을 물어도 같은 대답이 나왔다.

 

종로3가의 월 12만원짜리 쪽방촌에 장씨는 거처를 잡았다. 과일장사와 생선장사를 전전했지만 늘 쪼들리는 생활이었다. 임금이 싼 중국 교포가 많아져 고깃집에는 취직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 노숙인 무료급식 모습. 원조 노숙인인 장씨는 IMF 당시 ‘신참 노숙인’들에게 어디서 밥을 먹을 수 있는지 등의 지식을 알려줬다고 한다. ]]

 

“IMF 때 쏟아져 나온 노숙인들에게 거리생활 알려줘”

 

궁리 끝에 서울시에서 벌이는 공공근로사업에 참여했다. 낙원상가와 종묘 주변을 청소하며 하루에 200~300kg의 깡통을 수거했다. 부족한 대로 버틸 만했지만, 참여기간은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장씨는 돈이 떨어졌고, 쪽방촌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을지로3가 지하도에서 노숙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이던 당시는 노숙인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노숙인이 엄청 늘었는데 그들에게 어디서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지 등의 지식을 내가 가르쳐줬다”고 장씨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노숙생활이 쪽방촌보다 (술 먹고 싸우는 사람이 적어) 더 편했다”고 한다. 식사는 무료 급식소에서 해결했다.

 

그 때부터 장씨는 술을 입에 댔다. 술이 아니면 아는 사람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 장씨는 체격이 좋았는데 깡술을 먹다 보니 온몸이 삐쩍 마르고 간이 나빠져 얼굴이 거무스름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깡소주 다섯 병 정도는 마신단다.

 

남의 밥 얻어먹는다는 생각에 한겨울에도 몸 씻어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장씨는 종로 쪽방촌, 을지로 지하도, 남대문 쪽방촌, 서울역 등을 오갔다. 돈이 있으면 쪽방에 거주했고, 궁하면 거리로 나갔다. 겨울밤에는 박스 깔고 지하도에서 잤고, 낮에는 지하철을 타며 추위를 버텼다. 남의 밥을 공짜로 얻어먹는다는 생각에 한겨울에도 꼭 지하철 화장실에서 몸을 씻었다고 한다.

 

2008년 10월 장씨는 서울역 등에서 노숙인의 재활을 지원하는 단체 ‘성공회 다시서기 상담보호센터’의 자활사업에 참여했다. 매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담배꽁초와 쓰레기를 줍고, 한겨울에는 동료 노숙인들에게 뜨거운 커피를 타줬다. “놀면 술이나 먹는데, 움직이니까 운동도 되고 낫더라”고 말했다.

 

장씨는 자활사업으로 한 달에 40만원쯤 번다. 이따금 고물 수집도 한다. 덕분에 용산 동자동의 월세 16만원짜리 고시원에서 거주한다. 밥도 사먹을 수 있다. 장씨는 “자활하고 싶고, 노가다(막노동) 하고 싶고, 고물도 줍고 싶다”고 한다. 한마디로 놀기보다 일자리를 찾고 싶다는 것이다. 다음은 장씨의 말. 말더듬은 생략한다.

 

“자활사업은 1년 지나면 (기간이 차서) 못하지. 1년 뒤의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아요. 일 있으면 일하고, 없으면 못하는 거지.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면 좋겠어.”

 

“일 없으면 큰일인데…” 한숨

 

필자는 나라에서 일자리 대신 돈을 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장씨는 “잘못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젊은 사람이 일하지 않고 놀면 술만 먹어요. 물론 장애인이나 노인에게는 돈을 줘야지. 나는 곧 60세가 되지만 편하게 있기보다 일하는 게 좋아.”

 

자활사업이 끊길 때를 대비해 장씨는 한 달에 10만원이라도 저축하려 한다. 아플 때 약이라도 사먹고 싶지만 모은 돈이 없다고 한다. 한때 이가 몹시 아팠는데, 의료보험이 없고 다른 제도를 몰라 그냥 참고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월 40만원으로 저축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장씨에게 마지막으로 올해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소원은 없어. 앞으로의 일은 잘 생각하지 않아요(고민해도 큰 해결책이 없는 상태다). 자활사업이 잘 됐으면 좋겠지만, 올해 10월에 끝나면 나는 몇 달간 대기해야 해. 그동안에도 숙소 방세를 내야 하는데, 일이 없으면 돈을 못 버니 밖으로 나와야죠.”

 

특별한 소원이 없고, 앞으로의 계획도 세우지 않는다는 장씨는 “일 없으면 큰일인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1990년대부터 노숙으로 살아온 50대 장년인은 지금도 돈보다 일자리를 갈구하며 길거리를 맴돌고 있었다. <끝>

 

2009년 3월16일(월)

‘희망인프라’ 사회투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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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투자지원재단은 지난 2월 서울역 등에서 노숙자·부랑인·장기실업자들을 만나 1대 1 심층면접을 진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