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경제 소식들

지도 밖으로 행군한 여성 CEO

사회투자지원재단 2009. 3. 18. 11:32

지도 밖으로 행군한 여성 CEO

 

다음은 한 여성의 이력서다. 1980년대에 7년간 경찰직 근무.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당시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열과 성을 다해 일하던” 경찰 업무에 좌절감을 느껴 퇴직. 그 후 호주에서 3년간 신학 공부. 심상치 않은 경력이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1992년 한국국제협력단(개발도상국의 경제·사회 개발을 지원하는 공적 기관)의 해외봉사단원으로 스리랑카에 파견. 그 나라의 2대 건조지역이자 최대 낙후지인 함반토타 지역에서 서민대출기관인 마이크로크레디트 책임자로 종사. 소액대출, 시설개량, 빈곤구제 사업 등을 펼치며 스리랑카 낙후지역 개발의 모범이 됨.

 

 [[ 스리랑카의 최대 낙후지역인 함반토타 지역에서 아이들과 함께 한 이미경 티엔비 아이엔씨 대표. ]]

 

경찰·스리랑카 극빈지역 서민대출기관 책임자·기업인·컨설턴트

 

일단 이력서의 주인공부터 알아보자. 이미경 티엔비아이엔씨(TNB-Inc.) 대표가 바로 그 사람이다. 생소한 이름이지만 스리랑카에서 귀국 후 여성 기업인으로 변신, 터키 등과 원단 중개무역에 종사하며 2007년에는 서울중소기업청장의 표창까지 받은 인물이다. 지금은 무역업을 그만두고 경영 컨설턴트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그동안 봉사활동과 무역업 등을 하며 방문한 나라가 30여개국은 된다. 그중 스리랑카에서의 경험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우리나라에 마이크로크레디트라는 용어가 생소할 무렵부터 이미경 씨는 세계적인 빈곤지역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소액대출사업을 했다. 한비야 씨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말을 몸으로 실천한 셈이다.

 

“1992년에 제가 파견된 함반토타 지역은 스리랑카의 2대 건조지역 중 하나예요. 남쪽 해안가와 인접해 어부들이 많이 살아요. 선박이 낡아 사고가 빈번하고, 과부와 고아가 넘치죠. 남편 죽으면 아내가 따라서 자살하는 경우도 있어요.”

 

당시 이미경 씨는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교육을 마치자마자 함반토타 지역으로 이동했다. 산과 지형지물을 이용해 대강 뚫린 길로 10시간을 달렸다. 도착하고 보니 한밤중이었다. 물이 귀하고, 화장실은 문이 없고, 집은 천막을 둘러 세운 곳이었다.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함께 온 선배가 며칠 동안 나를 도와줘야 하는데 바쁜 일이 있다고 떠나버리셨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첫날은 한 공무원의 집에서 잤고, 다음날에 하숙을 얻었어요. 그 다음부턴 재밌었어요. ‘함반토타 부녀개발위원회’(WDF)라는 단체의 책임자로 활동을 시작했죠.”

 

WDF는 노벨평화상으로 유명한 방글라데시의 서민대출기관 그라민은행을 벤치마킹한 기관이다. 당시 스리랑카 정부는 함반토타 지역에 대해 ‘빈곤을 벗어날 희망이 없는 곳’이라고 간주했지만, 지역 담당자는 마이크로크레디트 기관을 통해 지역경제를 살리기로 결심했다. 함반토타 부녀개발위원회, 즉 WDF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 닭에게 모이를 주는 지역주민. 잘 갚을수록 대출이 늘어나고 자신의 사업규모를 키울 수 있다. ]]

 

주민에게 소액대출, 지역개발사업 진행

 

WDF는 해외 원조자금 등을 받아 주민들에게 대출하고 지역개발 사업도 진행했다. 책임자인 이미경 씨는 스리랑카 중앙 원조기관의 자금을 유치하고, 지역활동을 진행하고, 결과를 보고했다. 지역에 컴퓨터나 전화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서류를 몽땅 챙겨 원조기관이 있는 콜롬보 시로 가야 했다.

 

“10시간을 달려가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대출금을 갚죠. 원조기관은 잘못되거나 부족한 부분을 지시하고, 성과에 따라 추가 대출을 해줘요. 1000만원을 갚고 2000만원을 받으면 정말 좋잖아요. 지역주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가 열렬히 환영해요. 자금은 약 52개의 소규모 지역은행이 나눠 가져요. 얼마나 보람 있는지 몰라요.”

 

이씨에 따르면 함반토타 지역에서는 소액대출을 받기 위해 다섯 명이 한 조를 이룬다. 각자 한 달에 10루피(한화 1만원)씩 20~50회 이상 저금을 해야 자격이 생긴다. 그 뒤 다섯 명이 의논해 양계장이나 옷감 일 같은 각자의 비즈니스 모델을 정한다. 모두 동의하면 순차로 대출이 되는데 팀장 격은 제일 나중에 받는다.

 

“한 번 상환하면 더 많은 돈을 빌릴 수 있죠. 어떤 회원은 첫 대출로 50마리의 닭을 키웠어요. 달걀과 닭고기를 팔아 돈을 갚은 뒤 100마리를 키우기 위해 대출받는 식으로 사업 규모를 늘렸죠. 길가에서 호퍼(커리에 무쳐 먹는 밀가루 음식)를 팔거나, 비누공장을 운영하며 규모를 늘리는 경우도 많았어요.”

 

이미경 씨는 “대출 상환율이 95%쯤 된다”며 “다섯 멤버 중 한 명이 갚지 못하면 원칙적으로 대출이 안 되기 때문에 서로 감시하고 돕는다”고 말했다. 이자율은 꽤 높은 편으로 연15% 미만이 없다고 한다. 물론 동남아 지역의 고리대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심해 연리 1000%의 대출이 빈번하다는 현실은 있다.

 

“우리나라는 1000만~2000만원까지 빌려주는 경우도 있지만 스리랑카는 훨씬 대출금이 적죠. 처음엔 조금 빌려주고, 돈 갚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액수가 늘어납니다. 연 20%의 이율이라면 2~4%는 세계은행 같은 원조기관에 갚는 돈이고, 나머지는 운영비, 보험금, 인건비, 적립금 등으로 써요.”

 

한마디로 자체 운영체계를 갖춘 것이다. 현재 해외원조 등 외부자금은 대출에 쓰이지 않고 교육이나 도로 건설 등 다른 기획사업에 투자된다고 한다. 자금·인력이 충분해 사업 규모와 범위가 커졌기 때문이다. 어린이·엄마용 보험, 부녀회원 및 극빈층의 직업교육과 어린이 보육을 위한 트레이닝 센터 건립 등에도 투자한다.

 

 

[[ 현지 주민과 함께. 이미경 씨는 지금도 함반토타 지역을 찾아가곤 한다고 한다. 52개였던 지역은행은 현재 68개로 늘어났단다. ]]

 

스리랑카 지역개발모델의 모범으로 알려져

 

이미경 씨와 WDF의 지역개발 성과가 알려지면서 스리랑카의 다른 지역에서 찾아오는 매스컴과 관계자가 폭주했다. 함반토타 지역의 도지사·부녀회장·부회장·총무와 함께 1주일씩 한국을 견학하는 행사도 열렸다. 이씨는 “우리 지역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왔고, 나도 교회 강의 등을 하느라 바빴다”고 했다.

 

“몸 안 가리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일하다가 과로로 쓰러졌어요. 그때 뎅기열이라는 풍토병이 함께 왔어요. 20일 동안 지역병원에 입원했는데 차도가 없었죠. 결국 한국으로 후송됐고 4개월간 투병생활을 했어요. 병이 좀 나은 것 같아 스리랑카로 돌아왔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2년 임기를 못 채우고 퇴직하고 말았죠.”

 

“짐 싸들고 눈물을 흘리며 왔다”는 이씨는 귀국 후에도 한동안 병원 치료를 받다가 친구의 소개로 터키에 있는 원단회사를 찾아갔다. 터키행 비행기 안에서 처음 보는 원단 견본을 하나씩 만지며 특징을 달달 외운 결과 취직에 성공했다. 그 뒤 독립해 중개무역업에 나섰고, 서울중소기업청장의 표창까지 받았다.

 

지금은 컨설턴트 업무를 하고 있다. 기업 컨설팅을 위한 경영지도사 자격증은 경찰 재직 중에 땄다. 이 대표는 컨설턴트 업무를 시작하면서 2008년 사회투자지원재단 등이 진행한 마이크로크레디트 전문가 양성과정에도 참여했다.

 

이미경 대표는 현재 여성창업자 모임의 컨설팅 업무 등으로 분주한 생활을 하면서도 마이크로크레디트 과정을 이수한 컨설턴트들의 자조모임을 만들려 한다. “내가 도움을 주고 싶은 걸 읽어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경제위기의 늪에 빠진 우리나라에 이씨의 활동과 경험은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끝>

2009년 3월18일(수)

‘희망인프라’ 사회투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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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투자지원재단은 신나는조합, 사회연대은행, 한국창업교육협회와 함께 보건복지가족부의 후원으로 마이크로크레디트 전문가 양성과정을 운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