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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중독 아버지, 방황하는 아들을 만나다

사회투자지원재단 2009. 10. 6. 11:44

도박중독 아버지, 방황하는 아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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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많을 때는 1500만원씩 벌었고, 내 집도 장만했지요. IMF 외환위기 때도 힘들진 않았어요. 당시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목수 일을 했는데, 일거리가 계속 들어왔지요. 근데 돈이 갑자기 들어오니까 주체를 못했어요. 반은 쓰고 반은 저축했지요. 그러다가 친구를 따라서 경마장을 처음 갔어요.”

 

50대 중반의 김장목(가명) 씨는 목수로 일하며 모은 수억 원 어치의 집과 재산을 경마장에 고스란히 쏟아 부었습니다. 병든 아내와 한창 자라는 자식은 처가에서 지냈고, 김씨는 고시원에서 술에 빠져 살다가 끝내 부랑인 보호시설에 입소했지요.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던 그는 마음을 다잡고 재활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런 김씨에게 남모를 고민이 있습니다.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20대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것입니다.

 

 

[[ 도박, 술 등으로 피폐해진 부랑인·노숙인들이 인문학 강좌를 받는 모습. 이들에게는 지원과 함께 재활의지를 북돋는 상담과 치료가 필요합니다. 출처: 보현의 집 ]]

   

 

병든 아내와 어린 자식 부양하며 몇 억원 벌었지만

 

사연은 19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결혼 1년 만에 아이를 얻었지만 아내의 건강이 악화되자 김씨는 벌이가 신통치 않은 장사를 정리했습니다. 처가에 가족을 보내고 목수 일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목공 일을 하던 장인에게 배웠지만, 머리와 손재주가 좋은 김씨는 곧 두각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1990년대 초부터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돈을 모으고, 매달 처가로 병원비와 아이 양육비를 부쳤습니다. 몇 년 동안 대기업의 공사 현장 등에서 일하며 수 억 원을 벌었다는군요. 아내에게 보내는 외에도 김씨는 한 달에 술값으로만 100만원을 썼다고 합니다. 부인의 거듭된 사고와 수술, 돌볼 길 없는 아이 양육으로 괴로웠다는군요.

 

“결혼 생활이 엄청난 고난이었지만, 제 성격이 굉장히 낙천적이거든요. 술 한 잔 먹고 잊어버리고 나름대로 꿈을 꿨지요. 그래봐야 허황되지만 나는 언제든 일어설 수 있다, 악조건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고단한 삶의 시름을 술과 노동으로 견디면서도 김씨는 아파트까지 한 채 마련했습니다. “집사람의 병이 나아지면 아이와 함께 세 식구가 같이 살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 무렵 김씨에게 악마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경마에 빠진 때가 2000년인가 2001년인가 싶어요. 우연히 친구를 따라갔다가 배당이 큰 걸 터뜨렸어요. 적은 돈도 아니고 마권 5만원어치를 구입했는데 배당률이 160배가 넘었어요. 눈깔이 막 돌아버렸지요.” 

 

 

 

[[ 우연히 찾아간 경마장에서 처음으로 ‘대박’을 친 김씨. 그 뒤로 도박중독의 늪에 빠져들어 전 재산을 날립니다. 출처: 한국마사회 ]]

 

 

무서운 경마 중독

 

마권 구입 첫 날부터 ‘대박’을 친 김씨는 일도 나가지 않고 경마장을 찾았습니다. 이상하게 다음부터는 우승마를 잘 맞히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씨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작은 방까지 얻었습니다. 경마꾼들에게 조언을 듣고, 관련 정보지도 왕창 챙겨 샅샅이 훑어봤다고 하네요. 잠깐 반짝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열이 받으니까 경마가 더 안 돼요. 이성 상실. 내 명의의 밭을 처분하고 집도 팔았어요. 몇 억 원을 다 날려 버렸지요. 나중에는 통장 잔액이 1000만원도 남지 않았어요. 그 돈으로 고시원에 들어갔죠.”

 

고시원에서도 김씨는 도박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구입한 마권은 전 재산 330만원어치, 배당은 5.8배였다고 합니다. 그 돈으로 월세 방이라도 마련하려고 했다는군요. “말 한 코빼기 차이로 경주에서 졌다”며 김씨는 씁쓸해합니다.

 

그 때쯤 김씨의 아들은 서울의 유명한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김씨는 보통이 넘는 아내의 병원비와 약값, 아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 근근이 공사 현장에 나갔지만 예전처럼 열심히 일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한 번 전 재산을 잃고 나니 의욕이 생기지 않았답니다. 현장에서 사고까지 당합니다.

 

“2004년에 어느 시골에서 일하던 중이었어요. 원형 톱을 설치하고 깜빡 주의를 놓고 있다가 손가락을 다쳤어요. 손톱하고 살점이 날아갔지요. 뼈는 무사했지만 살이 돋아나는 데 너덧 달 걸리더라고요. 그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었어요. 가뜩이나 의욕도 없었으니 술만 마셨지요.”

 

몸이 다쳐 일을 못 나간 6개월 동안 김씨는 매일 취해서 살았습니다. 생활비가 떨어졌고, 괴로운데다가 방값도 없어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김씨는 “아들래미한테 돈도 못 대줬다”며 “처가에서는 난리가 났다”고 말하는군요. 결국 김씨의 아들은 군대를 갔다는데, 학비나 생활비 문제도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김씨와 아들의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도박 중독을 앓았던 아버지가 현재 방황하는 아들에게 얼마나 솔직한 심사를 털어 놓을지 지켜봐 주세요. <계속>

 

※ 희망인프라 블로그를 운영 중인 사회투자지원재단은 지난해 ‘노숙인·부랑인의 자립자활을 위한 감정적 임파워먼트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그때 만난 김씨의 사연을 여기 소개하는 이유는 이들의 재기·재활을 위해 마음의 치료가 다른 지원과 함께 이뤄져야 함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2009년 10월6일(화요일)

‘희망인프라’ 사회투자지원재단